:: 책 ::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스다 미리, 2010)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저자
마스다 미리, 마스다 미리 글,그림/박정임 역 지음
출판사
이봄 | 2012-12-1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마스다 미리 만화, 드디어 국내 상륙!일본 30대 싱글 여성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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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꽃이 교실에 다니기 시작한 지 4개월. 꽃꽃이도 즐겁고 다른 강습생들과도 잘 지낸다. 나름대로는. 그리고, 앞으로도 '나름대로'를 넘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를 넘어서고 싶지 않은 기분. 자신을 방어하기만 하는 나. 예전부터 이랬던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37p)

"엄마가 지금 제일 원하는 건 뭐야?" (...) "고모는 '보장'을 원한대." "보장? 그런거라면 엄마는 존재감을 원해. 엄마는 가끔 말이지, 바깥 세계에서 혼자만 뒤떨어진 기분이 들기도 해~" (49p)

지금, 갖고 싶은 옷이 그다지 없어~ 외출할 일도 없으니,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기분이 들어. 이렇게 이렇게도 많은 옷들이 널려 있는데. 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나인데 이 허전한 느낌은 뭘까? 그렇지만, 다들 이렇게 말하지. '사치스러운 고민'이라고. "듣기 싫어." (57p)

집안일에 지장이 없는 범위. 가족에게 소홀하지 않을 범위. 왜. 나의 세계에는 그런 조건이 붙는 걸까? (84p)

직장 동료의 아이가 감기에 걸려서 내일은 그녀의 몫까지 일해야 합니다. 괜찮습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 도와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내 쪽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느낌이 든다. 도와주는 횟수. 정말로 서로 돕는 거 맞나? (93p)

'영차'가 어울리게 된 나. 더이상. 사랑을 할 리도 없다. 길거리에서 뒤돌아봐 주는 사람도 없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일을 하려고 생각했지만 그때가 되고 보니 이미 일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일도 집안일에 지장이 없는 범위라고 정해져 있어서 만약 일을 한다고 해도 가족이 고마워할 것도 아니다. 억지로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행복한 거라고 모두들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자신이 희미해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희미해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102p)

모두가 가르쳐준다.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그런데 타이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109p)

"리나야, 작문! 뭐가 되고 싶다고 쓸 건지 정했니?" "음~ 몰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난,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아." (120p)

"엄마~ 숙제 있잖아." "숙제?" "왜 '주'자로 단어 만들기!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어. 나 '주인'이 아니라 '주인공'이라고 썼어." (121p) 

* * *

나는 태어났고 지금 여기 '있다'. 있다는 것은 이미 '존재'함을 뜻한다. 다만 나의 존재감을 확고히 하고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내 삶의 우선적인 가치와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며 산다는 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만이 행복한 건 결코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민은 있고 또 누구에게나 행복도 있듯이.

나이듦, 결혼, 그리고 자녀 양육은 각기 서로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어 더 기쁜 삶이리라. 우리는 이 모두 취할 수 없고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 * *

나이는 선택할 수 없다! 때문에 지나가는 시간을 푸념하고 속상해하기 보단 달콤 쌉싸름한 하루를 감사하며 만끽하기를 :) 매일 아침 바란다. (하아아... 생각이 깊어지는 책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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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박영자, 2014)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

저자
박영자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14-12-26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서재 쪽으로 풍겨와 코에 스미는 부드러운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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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날씨에는 중용의 미덕이 흐른다. 영국인들은 날씨에서 금방 좋아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법, 언제나 주의 깊게 준비하는 자세와 같은 삶의 교훈을 체득한다. 이런 가운데 질서와 평온함을 선호나는 성향이 깊이 뿌리내렸다. (68p)

"우린 영국인이야!" 영국인에게는 속마음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다. 폭발하지도 불붙지도 않는 국민성의 대명사이자 '뻣뻣한 윗입술'로 상징되는 영국인들의 감정 절제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84p)

하지만 영국인에 대한 수많은 수식어와 공고한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일어나는데 바로 '티타임'에서다. (86p)

차가 있다는 것, 그 차를 끓이는 행위가 영국인들에게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불안 감추기, 즉 어떤 행동이 불안하고 마땅치 않아 다른 행동 뒤로 숨는 것은 영국인들의 '날씨 얘기'와도 일맥상통한다. (89p)

일부 사회학자들은 커피하우스를 통해 커피 문화가 영국에서 꽃피었지만 차갑고 과묵한 기질상 평온함을 주는 홍차가 그들에게 더 적합했을 거라고 한다. (...) 커피처럼 강렬한 것보다 은근히 몸과 정신을 이완시켜주는 음료가 이들의 고질병을 치유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91p)

17세기는 커피하우스, 18세기는 티가든이 전성기를 누렸다. 차와 커피가 다르듯 티가든은 커피하우스와 달랐다. (...) 황태자부터 노동자 계층에 이르기까지 남녀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차와 커피 값을 포함해 1~2실링만 내면 누구나 환영받는 장소였다. (...) 당시 티 테이블 위에는 'T.I.P.S'라고 적힌 작은 상자가 있었다. 이는 'To Insure Prompt Service'의 약자로 "신속하게 서비스를 할 테니 상자에 돈을 넣어주세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101p)

영국에서 모든 계층이 홍차를 사랑했기 때문일까. 약육강식의 사냥터가 된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 어린 여자아이와 최하위계층의 일꾼들이 고통스럽게 재배한 차에 카리브 해 노예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인 설탕을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젛은 것이 바로 '영국식 홍차'라는 사실을 자주 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티스푼'이라는 합성어도 차와 설탕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합작품이 아닌가. (128p)

커피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를 여행하다보면 카페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마시고는 바로 문을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에 영국에서는 서서 파를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는 애초부터 여러 잔을 마실 수 있도록 물을 함께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커피보다 차를 마실 때 좀더 여유롭고 마실 수 있는 양도 차가 더 넉넉하다. (141p)

상류층에서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자 구매력이 생긴 중류층에서 이를 따라했다. 이어 노동계층 역시 중간계층을 모방한다. 차를 마실 때만은 가난한 농부도 부유한 상인이 될 수 있었고, 하인도 주인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영국의 홍차 문화는 생산과 소비, 노동과 여가, 남성과 여성, 사치품과 필수품이라는 극단의 요소 모두를 포함하는 특이한 경우다. (159p)

하이티는 산업혁명 시대에 서민들의 바빠진 일상이 늦은 귀가와 맞물려 생겨난 티타임이다. 애프터눈티가 상류층과 귀족들이 밤늦게 이뤄지는 화려한 만찬을 기다리는 동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생긴 것이라면, 하이티는 시골과 도시 노동자들 그리고 서민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홍차와 더불어 칼로리가 높은 고기 등을 먹은데서 유래됐다. (216p)

* * *

먹는 것보다 마시는 것에 더 애정을 쏟는 나라 영국. 영국과 홍차의 연결고리를 찾는 <홍차 너무나 영국적인>은 '홍차 아우라', '홍차 스파이', '홍차 중독자'라는 키워드로 홍차의 감성과 욕망 그리고 미식을 느껴본다. 

홍차가 영국과 영국민에게 어떻게 스며들게 되었는지 '아주 느긋하게' 홍차를 마시며 엿 볼 수 있다. 그리고 홍차와 관련하여 영국의 정치, 문화를 훑어 준다.  

술독에 빠진 영국의 식탁을 물들인 홍차. 차 한잔에 영국인의 계층이 있고, 그들의 삶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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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고양이 낸시 (엘렌 심, 2015)

 


고양이 낸시

저자
엘렌 심 지음
출판사
북폴리오 | 2015-02-24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트위터에 공개한 작은 그림들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고양이 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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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틀렸었어요.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건 저였어요.

고양이인 낸시만 보느라 다른 낸시들은 못 봤어요.

더거씨의 사랑스러운 막내 딸 낸시

지미의 소중한 동생 낸시

친구들을 배려하는 낸시

그리고 모두가 너무나도 아끼는 낸시

다들 저렇게 아껴주는데 어떻게 나빠질 수가 있겠어요."

(226p)

* * *

버려진 아기 고양이 낸시(Nancy)를 두고 지미아빠 더거씨는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내 낸시의 귀여움에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마는데...! 

꺄 :) 이렇게 사랑스러울수가!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흠뻑.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에 매료된다.

"다르지만 괜찮아!"라는 말과 함께 헤헤 웃어보이는 낸시를 보면 행복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마지막 장 할로윈 코스튬은 보너스♡

* * *

"헤헤..! "

"공주님 기분이 좋아 보여요~"

"네~ 낸시는 정말 행복해요."

(2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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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그들을 만나러 간다 파리 (마리나 볼만멘델스존, 2012)


그들을 만나러 간다 파리

저자
마리나 볼만멘델스존 지음
출판사
터치아트 | 2015-02-0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오늘의 파리가 있기까지 도시에 빛을 부여하고 역사를 창조한 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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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최대의 연애 사건 : 아벨라르, 엘로이즈

'선량왕',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를 선사하다 : 앙리 4세

프랑스 계몽주의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 : 볼테르

비극으로 끝난 호화로운 삶 : 마리 앙투아네트

스스로 왕좌에 앉은 황제, 유럽을 정복하다 : 나폴레옹

19세기 파리의 지치지 않는 기록자 : 오노레 드 발자크

에스메랄다와 카지모도의 창조자 : 빅토르 위고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화가 : 클로드 모네

열정의 천재 조각가 : 오귀스트 로뎅

파리 요리계의 넘버원 :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 마리 퀴리

남자와 여자를 모두 사랑했던 여성 작가 :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바람둥이 천재 화가 : 파블로 피카소

'리틀 블랙'을 창조한 패션 디자이너 : 코코 샤넬

실존주의 남성과 파리에서 가장 똑똑한 여성 :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작은 참새가 마음으로 파리를 부르다 : 에디트 피아프

작가이자 음악가, 배우였던 만능 재주꾼 : 보리스 비앙

영화를 위한 삶 : 프랑수아 트뤼포

천재와 광인 사이의 스타 디자이너 : 이브 생 로랑

* * *

2,000년 파리의 역사에 빛을 부여한 불멸의 인물들, 그들을 파리에서 만나다. 일대기를 간략하고 재미있게 살펴 볼 수 있어 좋았던 <그들을 만나러 간다 파리>. 파리 시내 지도와 함께 보니 더 재밌었던 듯 하다. 

나는 일대기와 사회, 문화적 코드를 풀어낸 영화를 좋아한다. '아멜리에' 보고 흠뻑 빠져버린 오드리 토투가 연기한 가브리엘 샤넬의 이야기, '코코샤넬'(원제: Coco Avant Chanel, Coco Before Chanel, 2009)이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귀를 사로잡는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생을 담은 '라 비앙 로즈'(La Mome, The Passionate Life Of Edith Piaf, 2007) 처럼 말이다:-) 

21살의 어린 그에게 주어진 디오르[Dior]의 후계자 자리. 트라페즈[trapéze line] 라인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패션 하우스를 열어 대성공한 이브 생 로랑. 그와 관련된 영화를 찾아보다 '생로랑'(Saint Laurent, 2014)이 4월 16일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발견.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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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2012)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저자
마스다 미리 지음
출판사
이봄 | 2014-03-1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여자만화가 마스다 미리를 통해 엿보는 남자들의 속마음마스다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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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새클턴의 위대한 항해』."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인류 최초의 남극대륙횡단을 시도한 영국 선원들의 탐험기다. 도중에 조난을 당한 선원들은 얼음의 바다. 말하자면 무인도에 고립된다. 배를 버리고 얼음 속을 걷기로 결정했을 때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소지품을 줄이는데, 모두, 금화를 버리고 가족사진을 선택한다. (27p)

『개 같은 내 인생』. 대학 다닐 때 친구에게 빌려 봤던 스웨덴 영화. 사랑하는 엄마가 병에 걸려 멀리 친척집에 맡겨진 소년의 이야기. 소년은 쓸쓸해지면 라이카를 생각한다. 1957년 인공위성 실험에서 우주로 쏘아 올려진, 홀로 죽어간 개, 라이카. '로켓에는 애초부터 돌아오는 장치가 없었지.' (73p)

쓰치다 씨는 아마도,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귄다면 상당히 잘 맞을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어쩌면 결혼까지 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애인과 헤어지면서까지 사귀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면 점점 좋아지다가 조금 싫은 부분도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며 서로 조금씩 익숙해지며 정이 생깁니다. 그 과정을 쓰치다 씨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제 귀찮아.' 이 넓은 하늘 아래에는 어쩌면 내게 훨씬 더 잘 맞는 남자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92p)

'내일이 아직 무엇 하나 실패하지 않은 새로운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 (105p)

말썽만 일으켜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퇴학을 당한 토토. 그런 토토가 그다음에 간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넌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라고 계속 말해주었지. 넌 사실은 착한 아이란다.라는 말, 어른이 되어도 모두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153p)

인생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찾을 필요가 없다. 알 필요가 없다.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까지든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나의 집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은 하룻밤을 자고 다시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164p)

* * *

요것도 재밌다. 마스다 미리가 '남자'의 관점에서 쓴, 30대 독신남 쓰치다의 일상, 직장, 결혼, 삶에 대한 고민을 담은 만화다.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느낄 수 있다. 번외편이 더 재밌는. 역시 모든 것은 타이밍 :)

* * *

나의 우주는 어디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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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이름을 말해줘 (존 그린, 2006)

 


이름을 말해줘

저자
존 그린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4-10-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전 세계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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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같은 이름의 소녀를 좋아하고 그들은 항상 나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 * *

"린지 리 웰스. 감리교 신자. 나도 테러리스트는 아니야." 그 소녀는 다시 생긋 웃었다. 콜린은 자신과 열아홉 번째 캐서린과 잃어버린 자신의 한 조각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미소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미소는 전쟁도 끝내고 암도 치료할 수 있는  그런 미소였다. (48p)

"맞아. 그렇지. 아버지 덕분에 난 일하거나 대학에 다닐 필요가 없어." 콜린은 그 말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하산의 그런 무관심한 태도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대체 뭐란 말인가? 신이 삶을 주셨다고 믿으면서 삶에는 TV를 보는 것 이상의 다른 뭔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50p)

"그렇다니까. 연애라는 게 정말 뻔하거든, 그렇지 않냐? 내가 그걸 예측하는 방법을 찾아냈어.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남녀라도 공식에 넣어보면 한 번이라도 데이트를 했을 경우 누가 누굴 찰지, 그리고 그 관계가 대략 얼마나 지속될지 그래프로 나온다니까." (65p) 

맞다, 바로 그거였다. 이미 있는 글을 다시 타자로 칠 수는 있지만 새로 만들어내는 작가는 아닌 것이다. 신동이지, 천재가 아닌 것처럼. 주위가 너무 고요해서 프린세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고, 그의 안에서 잃어버린 조각이 자아내는 공허감이 느껴졌다. "난 그냥 뭔가 중요한 걸 하고 싶어. 아니면 중요한 사람이 되든가. 그냥 중요해지고 싶은 것뿐이야." (139p)

콜린은 실연의 단조로움과 이 관계를 종종 연관 지어 생각해봤다. 우리에겐 32개의 치아가 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이가 하나하나 부러지는 고통을 겪으면 그 반복성 덕분에 둔감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143p)

그는 마침내, 마침내 울고 있었다. 둘의 팔이 엉키던 순간, 바보 같고 유치한 둘만의 농담들, 학교가 끝난 후에 그녀의 집에 가서 창문으로 그녀가 책 읽는 모습을 지켜보며 떠올렸던 감정들이 기억났다.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 그는 그녀와 같이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니면서 언제든 둘이 원할 때마다 자고 가는 자유를 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심지어 그것까지도 그리웠다. 그가 상상한 미래가 그립다니. (156p)

누군가를 아주 많이 사랑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결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만큼 사랑할 수는 없을 거야. (156p)

"음, 난 널 좋아해. 그리고 넌 내 앞에 있을 때는 카멜레온처럼 변하지 않잖아. 방금 그걸 깨달았어. 예를 들어 넌 내 앞에선 엄지손가락을 깨물잖아.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습관이라고 했는데, 내 앞에선 그 습관을 보여줬어. 그건 날 타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잖아. 난 너의 비밀 아지트야. 넌 내가 너의 마음속을 조금 들여다보는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야." (222p)

그 순간 린지가 알아차렸다. "아무도 해고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했군요." (282p)

"필요 없는 일이 아니야. 우리 다음 세대엔 공장이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너의 자식들과 그 자식의 자식들에게 공장이 있을 때는 마을이 어땠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게다가 얘들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했지. 세상은 네가 상상한 대로 머물러 있지 않아, 아가." (283p)

이 이야기의 교훈은 과거에 일어난 일은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과거가 되어버리지. 그리고 두 번째 교훈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교훈이 있을 수 있다면 차는 사람들이 꼭 차이는 사람보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거야. 실연이란 일방적으로 내가 당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나에게 일어나는 일일 뿐이거든." (303p)

* * *

나에게 성장소설은 늘 콩닥콩닥 설레고 조그마한 자극도 크게 다가온다.

똑똑하지만 천재는 아닌 '영재' 콜린. 열아홉 번 째 캐서린과의 이별로 가슴아파 하다 그의 유일한 친구 하산과 함께 하는 여행은 그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때마침 등장하는 린지. 캐서린은 아니었지만 콜린에게 린지는 캐서린 이상의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어린 시절의 풋풋한 정서가 느껴지는 소설 <이름을 말해줘>. 열아홉 살 소년이 겪었던 서로 다른 캐서린과의 관계로 정립하는 공통의 사랑공식. 발상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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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김영하 산문, 보다 (김영하, 2014)

부제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보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9-1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사람을, 세상을, 우리를, ‘다르게’ 보다 소설가의 눈에 비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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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 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20p)

누군가에겐 선택의 여지 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31p)

라캉은 히스테리자를 "자신의 욕망을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주체"로 정의한 바 있다. 영화 전체를 통해 서연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바꾸는 식의 게임을 벌인다. (73p)

부모와 자식 간의 분리는 여간해서는 이뤄지지 않으며 거의 모든 애정관계가 부모(특히 이성 부모)와의 관계를 삼각형의 한 축으로 하여 형성된다. 남자는 연애와 결혼에 있어 반드시 자기 어머니를 삼각형의 한 축으로 상정하고, 여자 역시 아버지를 한 축으로 삼는다. (74p)

비록 우리가 나약한 어린아이로부터 비록되었다 해도, 부모가 우리에게 부과한 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 (83p)

전쟁을 다룬 많은 소설들은 대부분 전쟁 발발 직전의 평화로운 풍경으로 시작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전쟁 발발 직전의 인물들은 재앙을 암시하는 나쁜 징조들에 유념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연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곧 아무 의미도 없어질 문제들 때문에 마음을 졸인다. (85p)

다수 동조편향과 정상화 편향 덕분에 우리는 대한민국이나 할렘, 일본과 멕시코에서 태연히 살아갈 수 있다. 다른 곳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 (90p)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91p)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선과 악은 지각에 근거하는데, 죽음은 이러한 지각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가장 끔찍한 악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폴커 슈피어링『철학 옴니버스』, 본문 93p)

우울증 환자들은 인간이 혼자라는 것, 죽을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이라는 것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현실적이다. '혼자 죽는' 고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그들에게는 삶이 이미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죽음으로 이 절대고독을 끝장내고자 한다. (94p)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본문 98p)

한 작가에게 반복적으로 하나의 모티프가 지속적으로 관찰될 때, 즉 한 작가가 어떤 특정한 서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모티프 혹은 서술방식이 그의 샤워부스일 것이다. (104p)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116p)

"(...)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꺠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에요." (123p)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이다. "자, 다시 갑시다." (123p)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폴 오스터『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본문 128p)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오르한 파묵『소설과 소설가』, 본문 130p)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160p)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미래는 이미 도착해 있다.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을 뿐." (170p)

* * *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을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 * *

소설가 김영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이 사람 글 참 쏙쏙 들어온다. 그리고 재미있다. 조만간 소장할 책 1위. ('읽다'와 '말하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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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오 해피데이 (오쿠다 히데오, 2007) 


오 해피데이

저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출판사
재인 | 2009-10-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티격태격 지지고 볶아도 집이 있어 행복한 여섯 남녀와 그 가족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흐음, 그렇구나. 노리코는 기운이 쭉 빠졌다. 세상은 15년 동안 전업 주부로 살아온 노리코가 주눅 들기에 충분할 만큼 힘센 자가 판을 치고 있다. (13p)

물건의 인기가 마치 자신의 인기만 같았다. 여기저기 오라는 데가 많았던 것도 처녀 시절 잠깐뿐, 결혼한 후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아, 들이쉬는 공기까지 상쾌했다. (19p)

가족이란 엄마와 아내에게는 참 무관심하다. 집 안에 당연히 있는 것, 이라고밖에 여기지 않는다. (27p)

두 손으로 뺨을 마사지하면서 생각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여배우는 타인의 시선을 받으면서 아름다워진다고 하지 않는가. 여자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한다. 나는 옥션에서 낙찰자에게 '아주 좋다'는 평가와 감사를 받아 자신감을 얻고 젊어졌는지도 모른다. (31p)

피식 웃는 한편 공감이 갔다. 너나 나나 모두 똑같다. 사람은 관계를 원한다. (39p)

서니 데이라. 어디든 가고 싶다. 바다든 산이든. 결혼한 후로 가족 아닌 사람과는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다. 늘 집을 지켰다.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마흔 세 살이 되었다. (45p)

노리코는 몇 번이나 꽃을 보고, 그럴 때마다 고맙다고 말했다. 이 행복한 기분으로 앞으로 10년은 충분히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가족이 있다. (48p)

결국 무인양품에서 한 시간 이상 돌아다니며 그릇과 조리도구까지 사고 말았다. 트렁크가 짐으로 가득찼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쇼핑이 의외로 즐거웠다. (62p)

"남자는 말이야, 혼자서 방을 쓸 수 있는 건 가난한 독신 시절까지가 아닐까 싶어. 그런데 진짜 자기 방이 필요한 것은 삼십 대가 지나서잖아. CD나 DVD는 얼마든지 살 수 있어. 그리고 비싸기는 하지만 오디오 세트도 마음먹으면 살 수 있고. 하지만 그걸 즐길 수 있는 내 공간이 없단 말씀이야……." (78p)

"가구도 그렇고 조명도 세련되었지? 독신자들이 꿈꾸는 방이야. 좀 좁다 싶은 게 더 좋아. 무엇이든 금방 손에 닿으니까. 난 이 방에 있으면 젊은 시절이 생각나고,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에 재미있고, 푸근하고, 그래서 툭하면 들렀던 거야." (87p)

"그럼 이만 간다." 사카이는 발길을 돌려 힘차게 거실을 나가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현관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마사하루는 잠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야 음악을 마냥 틀어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볼륨을 줄였다. 옛날에 끔찍이도 좋아했던 스팅이 <셋 뎀 프리>를 노래하고 있었다. (90p)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식탁 의자에 앉아 타닥타닥 키를 두드린다. 마냥 켜 있는 라디오에서는 주부를 상대로 인생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이 흐른다. 히로코는 이렇게 소박한 나날이 싫지는 않다. 크게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곧 마흔 살. 명실상부한 아줌마.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나이다. (103p)

다르게 살 수도 있었으려나. 히로코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삼십 대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지냈다. 인기 있다는 레스토랑 한 번 가지 않았다. 그러다 아줌마가 되고 말았다. 세상 일은 전부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듣는다. (122p)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잠시 동안의 자유 시간. 딱히 백화점에 오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 발길이 절로 향하고 만다. 한동네에 같이 가자고 할만한 사람도 없다. 혹시라도 서먹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결국은 거리를 두게 된다. 주부는 모두 혼자다. (125p)

'빅 서프라이즈, 금일 당사 도산!' (139p)

유스케는 몸이 둥실 뜨는 가벼움을 느꼈다. 홀가분해진 후에야 중압감이 컸다는 것을 느꼈다. 나만 믿고 따르라고 호언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만큼의 책임감은 있다. (142p)

먹으면서 점차 풀이 죽었다. 자신이 제공한 반찬이 맛없다는 것은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세상 여자들은 자신이 만든 반찬에 내려지는 심판을 어떻게 견뎌 낼까. (146p)

우리 아빠 회사가 망했어요,라.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아이들은 솔직해서 좋다.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내일부터는 가슴을 좍 펴고 아들을 데려다 주고 데려올 수 있다. (148p)

"낙담하지 말라고. 고진감래라고, 시련은 견뎌 내면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니까. 인간 도처에 청산은 있으니……." (157p)

노인이 종이봉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유스케에게 건넸다. <역경을 이겨 내기 위한 50가지 명언>이라는 책이었다. 역경이라. 표정을 관리하기가 곤란했다. (173p)

아쓰코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구나. 우리 부부가 세간의 오해를 사고 있구나."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의 뿌리가 깊잖아." (177p)

잘되었지, 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잘되었다는 건지, 자신도 잘 몰랐지만. (183p)

"난 그런 아파트나 있었으면 좋겠다." (189p)

"나 말이지, 이 기회를 놓쳤다가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시나가와 역 주변은 사무실만 많지 커튼 가게는 한 군데도 없단 말이야. 재빨리 자리 잡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늘 이렇다. 재빠른 사람이 이긴다는 얘기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끝장이라는 뜻이 아닌가. (191p)

에이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하루요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상대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아, 그렇구나. 단도직입이라는 게 이런 거로구나. 우리 남편은 이런 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구나. (225p)

뾰족 서 있던 것이 흐물흐물 꺾인 느낌이었다. 고슴도치가 치켜세웠던 바늘을 옆으로 누인 듯한. 아니면 네모난 치즈의 각이 녹아내린 듯한. 기분 전체가 둥글둥글해졌다. (227p)

* * *

요즘 왜인지 계속 기분이 축축해서  노랑노랑한(밝고 산뜻한) 책을 찾던 중 발견한 소설이다. 제목처럼 '해피'한 하루가 필요했던 것일까. 우연히 읽게 된 것 치고 꽤 잘 선택한 것 같다. (묘하게 끌리는 표지 또한 오쿠다 히데오의 느낌을 발산한다. 매력있다.)

[Sunny day], [우리 집에 놀러 오렴], [그레이프프루트 괴물], [여기가 청산], [남편과 커튼], [아내와 현미밥] 이렇게 6편의 단편으로 묶인 <오 해피데이>. 각기 다른 고민과 갈등을 안고 있지만 결국엔 사랑으로! 마무으리 되는 여섯 가족의 이야기이다.

늘 곁에 있어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가족. 일상에선 그리 부각되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일까, 잠시 잊고 산다. 하지만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있다 없으면? 적어도 난, 허전하고 이내 불안해진다.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에 더 소중할 수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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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2004)

 


공중그네

저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05-01-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못 말리는 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퍼뜨리는 요절복통 ‘행복 바이러...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사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라부를 쳐다보자 "저 사람, 블랭킷 증후군이야"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블랭킷…… 증후군?" "그래. 스누피 만화에 늘 담요 끌고 다니는 라이너스라는 남자애 나오지. 거기에서 생긴 명칭." (61p)

"흥, 해." 고헤이가 시키는 대로 히로스케가 코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믿고 모든 걸 맡긴다. 그러니 있는 힘껏 코를 풀 수 있는 것이다. 공중그네 캐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음을 비우는 일. 가장 좋은 예가 이라부다. (120p)

"감기 예방주사예요. 공짠데 좋잖아요." 간호사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나쁘진 않겠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저항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120p)

"선생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입스는 부정적인 쪽으로 암시를 걸기 쉬운 법이지. 아하하." (232p)

"다른 거요?" "정작 토해내야 할 감정들을 쌓아두고 있으니까, 위 속에 든 음식이 대신 나와버리는 거잖아. 강박증도 그 연장선상이지. 한밤중에 베란다에 서서 허공에 대고 다른 사람 욕이라도 실컷 떠들어보면 어떨까?" (274p)

"저기요, 호시야마 브랜드라는 게 있는 거거든요. 간판에 흠집을 내서야 되겠냐구요." "그러니까 일단, 간판을 내리는 거야. 그럼 홀가분해질 텐데." (285p)

"어쨌거나 인간에겐 변화가 필요해." "휴~." 아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아가 나지만, 납득할 만한 부분도 있다. 지금 자신은 지나치게 방어 자세다. (285p)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든다. 무너져버릴 것 같은 순간은 앞으로도 여러 번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들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 (305p)

인간의 보물은 말이다. 한순간에 사람을 다시 일으켜주는 게 말이다. 그런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자신이 자랑스럽다. (306p)

* * *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숨기고 살아간다. 대부분 그러한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솔직한 내 모습이 좋아서 나부터 마음을 열고 다가갔는데 언제부턴가 그 마음의 문이란게 닫혀가더라. 섣불리 남에게 나의 속내 또는 치부를 보이기 싫어지고 결국 나만의 동굴을 만든다.

의학박사 · 이라부 이치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연급 조연이라고나 할까. 이 사람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이상하리만큼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 이라부에게는 묘하게 마음을 열게되는 사람들. 뭔가 대단히 특별한 것은 없지만 이라부는 걱정과 근심 투성이인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준다.  

실은, 그들에겐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라부를 찾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  

* * *

조금 엇나갔지만,.. 벌써 85세가 된 워렌 버핏. 최근 이런 기사를 봤다.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이 코카콜라와 아이스크림인데 즉, 6살 아이처럼 먹는 것이란다. 

잠시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아이로 돌아간다는 건 왠지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짐과 고민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이같은 마음으로 '순수하고 진실된 나'를 유지하면 그것이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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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2012)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12-12-1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히가시노 게이고의 차기 대표작으로 손꼽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하지만…. 그곳에 인적은 없었다. 누군가 지나간 기척조차 없었다. (37p)

아이를 업은 채 가쓰로는 불길 속을 달렸다. 어디를 어떻게 가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거대한 불덩이가 차례차례 습격해왔다. 온몸에 아픔이 내달렸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벌건 불빛과 검은 연기, 그것이 동시에 온몸을 휘감았다. ... 중략 ... 의식이 아득해져갔다. 잠들어버릴 것 같다. 그 편지 글이 희미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147p)

"상담자가 누군지 알려고 해서는 안 돼. 그것도 규칙이야. 누군가 지켜본 걸 알면 그 사람은 두 번 다시 상담 편지를 넣지 못해."(173p)

"그런 거야 참 별일도 아닌데 말이야." 아버지는 편지들을 둘러 보았다. "다른 편지들도 그래. 대부분 내 답장에 감사하고 있어.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가만 읽어보니 내 답장이 도움이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본인들의 마음가짐이 좋았기 때문이야. 스스로 착실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아마 내 답장도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 (199p)

하긴 이별이란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고스케는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나는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인연이 끊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떻게든 회복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인연이 끊겼기 때문이다. (269p)

오늘 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올까. 나미야 잡화점의 존재가 자신의 인생에 큰 의미를 갖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지도 모른다. 벤츠가 사라진 뒤, 고스케는 편지를 우편함에 넣었다.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십이 년 만에 듣는 소리였다. 가슴에 고인 응어리가 툭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제야 마침내 결말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고 고스케는 생각했다. (318p)

* * *

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건 어지간히 중대한 사안인 게 틀림없다, 어설피 섣부른 답장을 써서는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한 참입니다. 늙어 망령이 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이것은 지도가 없다는 뜻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난감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상담 편지에 답장을 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난문을 보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미야 잡화점 드림

편지를 다 읽고 아쓰야는 고개를 들었다. 두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모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신의 눈빛도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아쓰야는 생각했다. (447p)

* * *

'힐링(Healing)' 도서로 유명해져 출간 후 쭈욱 베스트셀러에 자리하고 있는 소설<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가 타임워프(시간왜곡)를 소재로 따뜻함느껴지는 소설을 썼다는게 조금은 의아했지만, 읽다보니 역시 반전매력이 있다.

나의 가슴 속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고민을 진심으로 함께 나눠준다는 것.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까.

* * *

'나미야 잡화점, 단 하룻밤의 부활'. 그 날이 온다면 난 어떤 고민이 담긴 편지를 적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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