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 붉은 손가락 (히가시노 게이고, 2007)


붉은 손가락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출판사
현대문학 | 2007-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 최신작 추리소설의 긴장감...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 * *

"장기 말에는 손대지 마라. 한참 대국을 하는 중이야." "나는 장기는 잘 모르지만 이거, 전에 봤을 때하고 별로 달라진게 없는 거 같은데?" "그럴리가 있냐? 시시각각 전황이 변하고 있어. 상대가 제법 고수라서 말이지." (7p)

"요즘 화장품을 갖고 놀아." "화장품을?" "내 화장품을 주물럭거린 모양이야. 루주로 장난을 쳐서 손이 저 꼴이 되었어. 완전 어린애하고 똑같다." (30p)

아버지가 죽고 3년쯤 지났을 무렵, 이번에는 어머니 마사에가 다리를 다쳤다. 연말 대청소를 하다가 넘어져 무릎 뼈가 부러진 것이다. 나이가 많은 탓에 복합골절이었다. 수술은 했지만 원래처럼 걸을 수는 없게 되었다. 외출을 하려면 지팡이가 필수품이고, 집 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불가능했다. (36p)

"저어, 미안한데요. 핑크색 트레이닝복 입은 여자애, 못 보셨어요? 일곱 살인데."(39p)

늘 하던 대로 어린 아기 달래듯 조심조심 말을 붙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오미는 어렸을 때부터 걸핏하면 신경질을 내며 떼를 쓰는 성질이어서 어느새 그게 야에코의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아키오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육아의 대부분을 아내에게 맡겨온 이상, 이러니저러니 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51p)

이건 완전 싸구려 드라마 아닌가, 하고 아키오는 문득 생각했다. 살인이라는 심각한 현실이 뒤엉킨 것만 아니라면 그는 아내의 너무도 연극적인 행동에 실소를 흘렸을지도 모른다. 설마하니 이런 판국에 그녀가 스스로에게 도취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봐온 텔레비전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그녀가 이런 행동을 생각해낸 건 틀림없어 보였다. (59p)

그러자 야에코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똑바로 앞을 향한 채 말했다. "내가 대신 자수할 거야." (72p)

"지금은 그냥 가만둬. 전부 끝난 다음에… 제대로 끝까지 감춰낸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하면 좋잖아? 뭘 꼭 이런 때에 일부러 애를 괴롭히느냐고. 당신, 그러고도 아버지야?" ... 중략 ... 아닌게 아니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위기를 뛰어넘는 게 선결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과연 끝까지 이 위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어처구니 없는 과오를 범한 아들과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날이 정말로 오기나 할까……. (113p)

"여보……." 재촉하듯이 야에코가 말했다. "만약 이다음에 형사가 오면……" 아키오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만일 거짓말이 안 통하게 되었을 때는……." 입술을 핥았다. "그때는 어떻게 해?" "자수…… 시킬 거야." "여보!" 야에코의 눈이 험악해졌다. "그러니까 그건 안 된……" "끝까지 들어봐." 아키오는 심호흡을 했다. "나오미가 아니라……." (132p)

"저게 요즘 일본 가정의 한 전형이야. 사회가 고령화된다는 얘기는 몇 년 전부터 나왔었어. 하지만 그에 따른 적합한 준비를 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을 이제 각 개개인이 떠맡게 된 거야." (139p)

"하긴 그렇다." 하지만 가가는 간단히 대꾸했다. "살아가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혼자 몸이면 속 편하고 좋긴 하지." ... 중략 ...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의해서 결정돼. 그 사람이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건 모두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 (140p)

"화장품?" "엄마가 요즘 화장하는 데 관심이 있나봐. 하긴 다 큰 여자들이 하는 그런 화장 말고, 그저 어린애가 엄마 흉내를 내면서 루주로 장난치고 그러지? 그런 거하고 똑같아." "어머니가 그런 장난을 해?" (149p)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다툼쯤이야 세상에 흔해빠진 일이라고 결론을 내버리고 아키오는 시종 보고도 못 본 척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돌아오는게 마음이 무거워서 술집에 들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속에서 한 여자를 알게 되었고 어느새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 중략 ... 마침 그 무렵에 나오미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문제로 야에코가 상의를 해왔다. 시시하고 귀찮은 문제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오미를 나무랐다. 귀찮은 일을 만들어온 것이 짜증나고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153p)

어머니는 뒷마당으로 트인 쪽마루에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선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앞에 놓인 인형을 향해 중얼중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추레하게 때가 낀 오래된 프랑스 인형이었다. (217p)

어머니는 등을 돌린 채 웅크리듯이 앉아 있었다. 마치 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잘한 거야.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어……. 아키오는 다시금 되뇌었다. (231p)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부부라는 건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질긴 인연으로 묶여 있는 법이죠. 그래서 그 힘든 간병도 견뎌낼 수 있었을 거예요. 때로는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어서 빨리 세상을 떠나줬으면 하고 비는 때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막상 그때가 닥치면 날아갈 것처럼 개운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간병에서 해방되면 그다음에는 강한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이 많다더군요. 좀 더 잘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보내다니 정말 불쌍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나무란다는 거예요.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깊은 병이 들기도 하죠." ... 중략 ...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노인의 내면은 지극히 복잡하다는 거예요.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지요. 그런 노인네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것. 그런 정도밖에 없어요. 아무리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라도 본인에게는 소중한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253p)

"엄마, 갈 거야. 자, 일어서." 재촉을 받고 어머니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였다. 하루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서 아키오 일행 쪽을 향했다. (257p)

하지만 이 가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큰 전제가 뒤집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는 치매증에 걸린 게 아니다……! (270p)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인가요?" "그게 아니죠." 가가는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어니 세상에 자기 자식을 함정에 빠뜨리는 어머니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그쯤에서 마음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273p)

마쓰미야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교이치로 형을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그는 그 나름대로 아버지와 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 중략 ... 가가는 장기판 위에 말을 놓았다. 그리고 웃으며 아버지 쪽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기막힌 외통수인데? 아버지가 이겼어. 참 잘하셨어요." (286p)

* * *

줄거리 (옮긴이의 말)

평범한 한 가족에게 들이닥친 참혹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살인사건. 도쿄 교외의 한적한 주택가 정원에 누워 있는 어린 소녀의 사체. 어째서 우리 집 정원에 아이의 사체가?

아내의 급한 전화를 받고 회사에서 돌아온 중년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내 아들이, 설마 내 아들이 이런 짓을 하다니…….

사건이 차례차례 해명되면서 평범하게만 보이던 한 가족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활이, 상식적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소시민의 결코 상식적이지 않은 인격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 * *

술술 잘 넘어간다. 그만큼 몰입도가 높다. 언제나 그렇듯 치밀한 구성과 반전이 있다.

일본드라마 <백야행>으로 알게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시대를 막론하고 '엄마'가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은 다 비슷한가보다. 아들이 어머니를 범인으로 지목함과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슬픔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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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마스다 미리, 2015)


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저자
마스다 미리 지음
출판사
이봄 | 2015-02-16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평균 연령 60세 고령화 가족의 가슴 찡한 일상 이 만화의 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episode. 짐에 대해

"저기, 여보-" "네?"

"짐에 관한 얘긴데." "잼? 딸기잼이면 돼요? 왜요? 당신, 식빵 먹으려고요?"

"아니, 저기..." "근데, 아까 간식으로 찐빵 먹었잖아요. 어머 잊어버렸어요? 좀 전에 당신, 먹었어요!!"

"아니, 그러니까..." "아참, 따지는 듯한 말투는 안 좋다 그랬지."

"어이-" "나도 깜빡할 때가 있어요. 괜찮아요."

"짐." "네?"

"잼이 아니라 스포츠 짐(gym)의 짐." "아유, 뭐예요. 당신도 차암. 말을 똑똑히 하지... 짐이라면 왜. 다케우치 씨 남편이 다니는 것 같던데요. 등록해보기 전에 체험해볼 수도 있대요. 아, 그래서요? 당신은 무슨얘길?"

"물으려고 했던 것 다 알았어.

* * *

episode. 옷장 정리

옷장 정리를 하는 어머니 노리에 씨 입니다.

"이 스웨터 작년에 한 번이라도 입었나? 이 카디건은 사이즈가 좀 안 맞아~ 옛날에는 털실을 풀어서, 아이 스웨터를 떠주었지만 이제 그런 것도 입지 않을테고. 어머나 이 옷, 아직 있었네."

돌아가신 노리에 씨의 어머니 스웨터.

노리에 씨는 한번 불러보고 싶어졌습니다.

"엄마."

그리운 그 울림. 부를 수 없게 된 그 말.

"엄마. 도와줄까." "아냐. 곧 끝나."

* * *

episode. 희한한 습성

사와무라 씨 댁의 어머니. 외출에서 돌아올 때. 아주 잠깐, 딴 데를 봅니다.

엄마 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 시로 씨도 여기서 딴 데를.

딸인 히토미 씨는 어떨까요. 역시 여기서 휙 돌아봅니다.

사와무라 가족의 특이한 습성일까요?

아뇨,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애지중지 키웠던 시바견 치비. 죽은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치비 집이 있던 곳을 무심고 돌아보게 됩니다.

* * *

episode. 크리스마스 이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저녁은 외식할까." "그런 건 됐어~ 나간들 어디로 갈 거야."

"왜, 역 앞에 레스토랑 있잖아." "거기 망해서 편의점 됐어. 이브에 평균연령 60세인 가족이 갈팡질팡하는 거 싫어~~~"

"그래? 그럼 초밥이라도 배달시킬까?" "됐어, 됐어. 그냥 밥 먹어."

히토미 씨는 그냥 내버려두길 바랐습니다. (남친 없는 것 배려하느라 그런 것 다 보인다니까.)

"정말 괜찮아? 히토미." "괜찮다니까!!"

"닭 튀김이라도 해줄까." "마음대로.

"다녀왔어~ 케이크 사왔지!" "어머나."

(혹시 이 사람들. 나하고 관계없이 즐기는 거 아냐?)

"역앞에서 팔더라고." "이야~"

"오늘 저녁은 파티해요."

* * *

episode. 푸슝할래?

퇴근길의 히토미 씨입니다.

"하여간, 위에서 자꾸 의견을 바꾸니까~ 그 불똥이 전부 사원한테 오는 거잖아! 잔업, 잔업! 아~~~~ 어른이란 게 싫다 싫어."

"다녀왔어요~" "어서와라, 고생했네. 저녁 먹고 온 거지?

"응, 회사에서." "푸딩 있는데, 먹을래?"

"푸딩이라~ 어디의?" "어디긴 슈퍼에서 산 거지."

"제과점 것이 아니구나~" "투덜거리려면 먹지마라~"

"먹을래. 먹을래. 저기, 엄마앙. 커피도 좀~ 피곤해서 꼼짝도 못하겠어."

"푸딩은 푸슝할 거야?"

"응?" "그러니까 접시에 푸슝해서 먹을거냐고?"

어린 시절, 푸딩은 꼭 접시에 푸슝해서 먹고 싶어했던 히토미 씨. 긴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는 기억하시는군요.

"네, 푸슝해주떼요!"

* * *

episode. 가까운 곳의 힌트

"한 번이어도 좋으니 따보고 싶네요~" "뭘?"

"특허요." "특허?"

"발명품이 대박나면 큰돈 벌 수 있잖아요? 뭐 없을라나." "가까운 곳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 방에도 힌트가 굴러다닐지 모르지."

"음~~ 뭐가 있으려나?" "불편하게 느끼는 점 같은 것 없어?"

"있어요. 있어. 불편한 것." "오, 뭔데?"

'싱크대 아래 선반'이라고 말하려다, 노리코 씨는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은 옛날에 시로 씨가 만들어 준 선반이거든요.

"저기, 병뚜껑이 단단해서 잘 안 열려요." "그런 상품은 벌써 나와 있을걸."

조금쯤 불편해도 사랑이 담긴 선반이지.

"전병을 대신 씹어주는 기계는 어때?" "필요 없어요."

* * *

마스다 미리의 그림체는 단순하고 밋밋해서 가벼운 내용일 것 같지만 그리 가볍지 않다. 내게 항상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래서 좋다.

내 나이 40세 쯤이면 우리 아빠 엄마는 '고희'겠다. 나이가 더해가며 애정이 돈독해지신, 지금껏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이제 온전히 두분만 남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를 볼 때면 내가 더 가슴이 설렌다. 나도 더 애틋하고 애정넘치게 살아야지! 라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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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2013)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때는 이미 수십 명의 사냥감을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해 땅에 묻은 뒤였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이 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8p)

금강경을 읽는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9p)

"기차 레일이 끊어지는데도 그걸 모르고 화물차가 계속 달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일이 끊어진 지점에 기차와 화물이 계속 쌓이겠죠? 난장판이 되겠죠? 어르신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45p)

머리가 복잡하다. 기억을 잃어가면서 마음은 정처를 잃는다. (48p)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나를 낳은 어머니, 당신 아들이 곧 죽어요.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혹시 나는 인간 광우병이 아닐까? 병원에서 숨기고 있는 걸까? (48p)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게 유일한 위안이다. 죽기 전에 바보가 될 테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될 테니까. (52p)

배가 고파 국수를 말아먹었다. 먹다보니 맛이 이상하다. 뒤늦게 깨닫는다. 간장을 넣지 않았다. 간장이 어디 있나 아무리 찾아도 없다. 새로 하나 사야 할 것 같다. 내가 죽은 후에 집 어디선가 수십 개의 간장병이 발견되는 건 아닐까. 설거지를 하다가 다시 좌절. 먹다 남긴 국수가 그릇째로 개수대에 들어 있었다. 오늘 식사는 국수만 두 그릇. (56p)

메모지에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적혀 있다. 뭘 보다가 적어놓은 걸까. ...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약을 드세요"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수밖에. (93p)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나같은 사람이 더 위험하지. 박주태가 은희를 죽으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105p)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출발 카운터의 항공사 직원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바위처럼 확고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태연하게 카운터로 다가가 여권과 항공권을 내민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죄송하지만 하루 일찍 오셨다고 말핟나. 하지만 그는 직원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다. ...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126p)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143p)

* * *

간결하게 압축된 남성적인 문체와 단호하고 전진적인 속도감으로 독자의 시선을 움켜줘버린. 그래서인지 '너무' 잘 읽히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연쇄살인'과 '치매'라는 소재를 잘 버무렸다. 살인자와 치매환자가 느끼는 두가지 감정을 모두 풀어내고 있어 신선하다. 가슴에 남았던 내용을 추려보니 살인보단 '치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많다.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올 수 있지만 겪지 않아 생소했던 질병이 내 주위사람 또는 나에게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관심있게 봤다. 미래 기억을 잃고 결국엔 현재의 사람도 과거의 사람도 아닌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나'라는 존재.

우리는 남의 고통 속에 태어나 나의 고통으로 죽게된다. 무섭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출생과 사망, 어느 것도 내 의지에 따른 건 없다. 자살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만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선택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급 마무리.

 * * *

살인이 치매로 덮어질 수 있는 행동일까? 치매가 오기 전에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은 죄를 받아 마땅하지만 살인과 치매가 모두 현재진행형이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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