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2013)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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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때는 이미 수십 명의 사냥감을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해 땅에 묻은 뒤였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이 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인은 시라기보다 산문에 가깝다. 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8p)

금강경을 읽는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9p)

"기차 레일이 끊어지는데도 그걸 모르고 화물차가 계속 달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일이 끊어진 지점에 기차와 화물이 계속 쌓이겠죠? 난장판이 되겠죠? 어르신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45p)

머리가 복잡하다. 기억을 잃어가면서 마음은 정처를 잃는다. (48p)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나를 낳은 어머니, 당신 아들이 곧 죽어요.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혹시 나는 인간 광우병이 아닐까? 병원에서 숨기고 있는 걸까? (48p)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게 유일한 위안이다. 죽기 전에 바보가 될 테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될 테니까. (52p)

배가 고파 국수를 말아먹었다. 먹다보니 맛이 이상하다. 뒤늦게 깨닫는다. 간장을 넣지 않았다. 간장이 어디 있나 아무리 찾아도 없다. 새로 하나 사야 할 것 같다. 내가 죽은 후에 집 어디선가 수십 개의 간장병이 발견되는 건 아닐까. 설거지를 하다가 다시 좌절. 먹다 남긴 국수가 그릇째로 개수대에 들어 있었다. 오늘 식사는 국수만 두 그릇. (56p)

메모지에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뜬금없이 적혀 있다. 뭘 보다가 적어놓은 걸까. ...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식사하시고 30분 후에 약을 드세요"같은 말을 기억하는 게 바로 미래 기억이란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수밖에. (93p)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 ―나같은 사람이 더 위험하지. 박주태가 은희를 죽으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105p)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출발 카운터의 항공사 직원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바위처럼 확고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태연하게 카운터로 다가가 여권과 항공권을 내민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죄송하지만 하루 일찍 오셨다고 말핟나. 하지만 그는 직원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다. ...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126p)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143p)

* * *

간결하게 압축된 남성적인 문체와 단호하고 전진적인 속도감으로 독자의 시선을 움켜줘버린. 그래서인지 '너무' 잘 읽히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연쇄살인'과 '치매'라는 소재를 잘 버무렸다. 살인자와 치매환자가 느끼는 두가지 감정을 모두 풀어내고 있어 신선하다. 가슴에 남았던 내용을 추려보니 살인보단 '치매'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많다.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올 수 있지만 겪지 않아 생소했던 질병이 내 주위사람 또는 나에게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관심있게 봤다. 미래 기억을 잃고 결국엔 현재의 사람도 과거의 사람도 아닌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나'라는 존재.

우리는 남의 고통 속에 태어나 나의 고통으로 죽게된다. 무섭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출생과 사망, 어느 것도 내 의지에 따른 건 없다. 자살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만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선택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급 마무리.

 * * *

살인이 치매로 덮어질 수 있는 행동일까? 치매가 오기 전에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은 죄를 받아 마땅하지만 살인과 치매가 모두 현재진행형이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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