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 종이 여자 (기욤 뮈소, 2010)

 


종이 여자

저자
기욤 뮈소 지음
출판사
밝은세상 | 2010-12-2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베스트셀러 작가와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의 색다른 사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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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다. 진정제가 없으니 아이팟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진통제 탕약을 조제하는 신관의 심정으로 정성들여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필립 글래스 등 이질적인 음악을 조합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든 다음 사운드독에 꽂았다. 거실 가득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울려 퍼졌다. 재즈 마니아가 아닌 사람들도 좋아하는 재즈 명곡. (p.89)

호감이나 친밀감 혹은 우정이라는 말은 캐롤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릴 때만 맺어질 수 있는 관계, 좋은 일보다는 궂은일에 더욱 결속력이 강한 관계, 결코 변치 않는 의리로 맺어진 영원한 관계였다. (p.112)

상점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스탄 게츠와 주앙 질베르토의 마법 같은 앙상블이 빚어내는 <The Girl From Ipanem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40년도 넘게 엘리베이터 안, 슈퍼마켓, 주유소 같은 데서 이 명곡을 쉴 새 없이 틀어 보사노바의 걸작을 훼손시키는게 못내 안타까웠다. (p.140)

"잭을 처음 본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어요. 어떤 확신, 일종의 본능적 끌림 같은 것이었죠. 서로 이 사람이다, 알아본 거죠. 오래전부터 함께였던 사람들처럼." 막 지껄이네. 하나같이 진부한 얘기들, 어쩌겠어, 불행하게도 다 내 탓인걸. (p.155)

"당신이 말한 그 '깊은 맛'이라는 게 정확히 뭘 염두에 둔 말이죠?" 빌리가 예를 찾으려 애를 쓰다 조금 전에 산 망고를 자르며 말했다. "예를 들어 이런 과일의 맛 말이에요." "어떤 거요?" 고운 얼굴을 바람결에 내맡기려는 듯 그녀가 고개를 하늘로 들고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의 느낌 같은 것." "난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그녀의 말이 전적으로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인 경이를 포착하는 데 서툰 작가였다. 왠지 그런 느낌은 나한테 잘 와 닿지 않았다. (p.199)

빌리는 햇살이 가득한 테라스 앞쪽으로 걸어갔다. 태평양과 코르테스 해가 만나는 바하 반도 최남단의 풍경이 발아래 마법처럼 펼쳐져 있었다. (...)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의 '라 푸에르타 델 파라이소'라는 호텔의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p.217)

"잠깐! 움직이지 마! 치즈!" 찰칵, 즈즈즈즈즈 (...) "나도 좀 보자! 나도 좀 보자!" 마법 같은 3분간의 기다림. 캐롤은 내 어깨에 기대 필름 위에서 서서히 사람 형상이 드러나는 순간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캐롤이 드디어 나타난 사진을 보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p.226)

마침 바 구석에서 누군가 피아노에 앉아 <As Time Goes By>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흑인 피아니스트 샘이 앉아 있을 것 같은 착각에 피아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죽으로 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오로르였다. (p.253)

포효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빗발이 점점 굵어지며 창문에 두터운 장막을 드리웠다. 버번 스트리트 바의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서 오로르가 피아노를 치며 블루스적인 감성으로 감미롭고 호소력 있게 부른 <A Case of You>가 끝났다. (p.256)

오로르와 내가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게 사랑은 산소 같았다. 우리의 삶에 빛과 광채, 강렬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게 사랑이라 믿었다. 하지만 오로르는 아무리 멋진 사랑이라도 결국 환상이며 위선이라 여겼다. (p.259)

캐롤은 권총 손잡이를 양손으로 꼭 잡은 채 정신없이 그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밀로는 하얀 모래와 터크와즈 빛 바닷물에 둘러싸인 작은 산호초 위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다. 그날 오후, 맥아더파크 빈민가 임대 아파트의 그림자가 멕시코 끝까지 뻗쳐 있었다. (p.267)

"그럼 오늘밤이 우리의 모험을 끝내는 날인가?" 빌리가 짐짓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맞습니다. 우리 둘 다 임무 완수를 했으니까. 당신은 소설을 끝냈고,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당신한테 되찾아주었으니까." (p.447)

"어디로 갈까요?" 그녀가 시동을 걸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p.480)

* * *

사랑스러운 빌리의 끊이지 않는 수다에 나는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책장을 덮었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책 La fille de papier, <종이 여자>.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이야기 전개가 쉴 틈 없이 빼곡하다. 어느 한 장면도 스쳐지나가는 법 없이 밀도 있게 묘사하여 (상상 속의) 눈을 즐겁게, 틈틈히 상황을 고려한 노래를 삽입하여 (상상 속의) 청각까지 즐겁게 해준다. 아 너무너무 재밌어 :)) 최근 본 소설 중에 가장 인상적이다.

캔디핑크로 도색한 1960년대 식 피아트 500. 너무 귀엽고 앙증맞잖아! 히잉

1960 피아트 500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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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종 왜건, 경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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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구해줘>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센트럴파크>. 꺄, 앞으로 볼 책이 왕창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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